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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땅 : 듀랑고 - 균형자

chaz.uu 2018. 3. 30. 23:51

내 딸아.

비 내리고 바람 불어도 눈을 감으면 너를 떠올린단다. 용암이 흘러내리는 해안에서도, 벌레 울음소리 가득한 반얀나무 덩굴 아래에서도, 얼어붙은 설원의 폭포 위에서도, 네가 떠올라. 너를 묻고 돌아서야 했던 날이 맴돌지. 아빠는 이제 괜찮단다. 너는 들을 수 없겠지만, 아빠가 어떤 마음인지 말해주고 싶구나.

네가 지구에서 태어났을 때, 의사는 그랬지. 환경 오염으로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병이 있다고. 증세가 심각해 3개월도 못 살 거라 그랬단다. 그 의사는 아무것도 몰랐어. 넌 유리 벽 건너에 누워 작은 손을 쥐었다 폈단다. 작은 눈동자는 빛을 향해 움직였어. 살갗은 홍조를 띠었고, 머리칼은 검고 빛났지. 너는 생명이었어. 모두가 복도에서 울고 있었지만, 아빠는 그러지 않았어.

네 엄마는 마음이 아팠어. 더는 살 수가 없었지. 그건 엄마의 잘못도, 너의 잘못도 아니었단다. 아빠는 너로 인해 더욱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어. 조그맣고 마르고 야위었지만, 넌 살아 있었고, 너의 몸짓은 섭리였지. 세상의 섭리가 너로 인해 나타나고 있었어. 의사의 말은 완전히 틀렸지. 너는 희망이었어. 세상의 질서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려도, 희망은 어디선가 태어날 거란 걸 보여줬어.

너는 하루에 약을 수십 가지를 먹어야 했지. 산소 호흡기를 뗄 수도 없었어. 밤마다 힘겹게 숨 쉬는 너의 손을 잡고 묵상했어. 슬픔이 지나고, 분노가 잦아들고, 한 생각이 남았지. 모든 삶은 평등해. 바위 밑에 자라는 이끼의 삶도, 우주를 향해 로켓을 쏘아 올리는 유인원의 삶도, 모두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최선의 형태이며, 세상의 조화를 이루는 각자의 몫을 갖고 있단 걸 네가 알려줬어. 넌 너로서 행복을 찾아 살아가야 하고, 나는 내 삶을 거기에 바치기로 했단다. 3개월이 지나고, 다시 3개월 지나고, 더 긴 시간이 흘렀어. 느렸지만 네 손과 발은 움직였고, 입에선 웃음소리가 번졌어.

피켓을 들었단다. 변호사를 만났고, 그 외에도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지. 그건 너의 삶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어. 네게 원치 않은 고통을 안겨 준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어. 얘기하기 부끄럽지만 너를 만나기 전까지, 아빠는 개인의 행복으로 숨으려고만 했던 인간이었단다. 너를 만나고 나서야 우리를 감싼 환경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 누가 환경을 파괴했고, 질병을 만들어냈고, 네게 고통을 줬는지를 명확히 알아내야만 했어. 세상의 조화를 지키기 위해선, 조화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를 잘 이해해야 했지. 기나긴 싸움이었단다. 환경은 많은 요소의 무수한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복잡함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들의 좋은 방패가 되었지. 그들은 늘 그랬지. 자신들이 원인이 아닐 것이라고 했어. 아빠는 자료를 모았고, 그들에게 분명히 제시했지. 그들의 책임이 무엇인지 정확히 규명했어. 그들은 세상의 통제를 받아야 했어. 그들은 그랬어.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인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자연은 스스로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아빠는 그랬단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재판을 걸어 인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바꾸려고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거라고. 그렇게 선언적이고 상투적인 말이 지나가고, 자료가 더 명확했던 쪽이 이겼어. 아빠는 그렇게 재판에서 이겼단다. 너는 호흡기를 떼어내고, 가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도 할 줄 알게 되었지. 여전히 많은 약을 먹어야 했지만, 어떤 의사도 너에게 3개월 밖에 못 살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어. 너는 그 열 배가 넘는 시간을 살았으니까.

우린 처음으로 같이 여행을 가 보기로 했었지. 바람이 따뜻하고, 햇살이 좋고, 먼지가 없는 곳으로 가기로 했어.

그때 우린 워프를 겪었지. 그렇게 듀랑고로 왔지. 워프는 너와 내가 살던 세상을 바꿔 놓았어. 워프가 우리를 덮쳤을 때, 너는 자고 있었어. 너는 그렇게 고통 없이 편하게 갔단다. 네가 숨을 거뒀을 때, 너는 너의 병으로 인해 쓰러진 게 아니었어. 그저 워프 때문에 사고를 당했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쓰러진 거였어. 넌 단 한 번도 그 병과 그 병을 안긴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어. 숨 쉬고, 세상에 반응하고, 너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물러나는 일이 없었지. 너는 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싸웠고, 그렇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숨이 멎었던 거야.

널 보내고 생각했어.

만약에 말이야. 우연히 자연스러운 삶의 끝이 너를 거치지 않고 네가 살아남았다면, 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너는 어떤 세상을 원했을까? 너는 용감하고 늘 희망을 잃지 않기에 병마와 싸울 수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지는 못했을 거야. 마음이 선했던 너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애도했을 거야. 그리고 그런 질병을 만들어낸 세상을 바꾸려고 했겠지. 아빠가 너를 위해 재판을 했던 것처럼. 탐욕과 무절제가 빚어낸 세상의 나쁜 변화를 다시 좋은 쪽으로 끌어내려고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거야. 너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담대하고, 꺾이지 않는 희망을 품고 있는 아이였고 그렇게 자랐을 테니까. 너는 아빠보다 훨씬 나은 존재가 됐겠지.

듀랑고에 오고 나서 아빠는 한동안 괴로웠단다. 너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았기에 널 보내는 걸 맨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었지.

말하는 법을 한동안 잊어버렸어. 모르는 섬에 가서 파도를 덮고 잠이 들었지. 햇볕에 데운 바위 위에 누웠어. 맹수들의 곁을 죽은 짐승의 피를 바르고 지나가기도 했단다. 굶주리고, 목이 마르고, 환청을 듣고, 신기루를 보면서 계속 걸었어. 어디에서도 너의 모습을,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지. 꿈에서조차 네 병이 심각했던 시절의 모습만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단다. 네가 아빠한테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한 건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넌 너 자체로 완전했지. 그저 아빠의 모자란 아집이 남아서 아빠를 계속 괴롭혔어.

많은 감정이 밀려왔다 씻겨 나갔단다. 머릿속에서 길고 긴 독백이 이어졌어. 아빠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삶은 두루뭉술하고 불명확한 구름 같았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어. 너는 없고 나는 남았지.

어느 날 해 질 무렵, 시든 갈래나무 아래에서 알게 됐단다. 겉이 푸석하고 검게 썩은 갈래나무 밑동에서 버섯이 자랐지. 버섯은 자기의 색깔을 갖고, 세상을 향해 뻗어나고 있었어. 그 옆에 작은 벌레들이 따라 움직였지. 벌레들은 서로 잡아먹고 도망가며 그 순간조차 치열한 생태계를 이뤘어. 그 광경은 마음속의 번뇌, 슬픔, 욕망과는 무관했지. 세상은 자기 스스로 조화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어. 매 순간이 질서를 향한 몸부림이었지. 그 모습을 보자 너를 위해 했던 일들이 떠올랐단다. 피켓을 들거나 재판에 출석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더 나은 조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란 걸 깨달았어.

환경의 조화는 음악 연주와 같았어.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생명이 빚어내는 흐름이, 각자 이어져 곡조를 이뤘고 아름다움이 되었지. 고개를 들자 바람이 불었고, 꽃씨가 휘날렸고, 늪에선 물고기가 물살을 저으며 헤엄쳤어.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새떼가 무리를 지어 날았단다.

자연은 그 순간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너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지. 너는 세상의 조화 속에 있었단다. 너를 위해 했던 일을 할 때, 너는 거기에 있을 거란 걸 알게 되었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강하고 생경한 경험이었지. 슬픔이 사라질 순 없겠지만, 슬픔을 안고, 견디고, 묵묵히 살아갈 힘을 얻을 만큼 값진 경험이었어.

그곳에서 곧 워프 에너지가 작은 워프를 일으켰단다. 그 힘은 주변을 흔들고 크레이터를 남겼지. 그곳에 잠시 현현(顯現)했던 조화는 그 워프에 흔들렸단다. 환경은 질서를 잃고 망가졌고, 생물의 숫자는 자연스러운 수준을 벗어났지. 워프가 자연에 미치는 악영향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어.

고개를 돌리자, 뗏목을 탄 사람들이 해변에 내렸어. 그들에겐 다른 존재를 향한 어떤 존중을 엿볼 수가 없었어. 그들은 탐욕으로 움직이는 생물이었고, 스스로 멈추는 일이 없었단다.

그 순간 앞으로 할 일이 분명해졌단다. 네가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어. 넌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정해줬어. 너를 위해 했던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 아빠는 삶의 이유를 얻었어. 더 방황하지 않게 되었고. 생각이 바로 섰으니까.

네가 본 적 없는 사람들을 만났어. 엽록 포럼이란 단체에 참여했지. 서로 생각은 다르지만, 환경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선 입장이 다들 같았어. 좋지 않은 일도 많았지만, 서로의 공통점에 더 주목하려고 한단다. 아빠는 그 사람들과 만나면서 생각을 더 가다듬고 정리할 기회를 얻었지. 워프와 인간이 듀랑고의 환경에 미칠 영향을 냉정하고 분석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고, 환경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촉진했지. 그리고 세상의 조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취해야 하는 조치를 실천할 강한 신념도 얻게 되었어. 그 조치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란다. 때론 폭력적인 방법이 필요할 때도 있지. 그 마음의 굴레를 벗어나는 건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동기부여가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았어. 내 마음이 약해질 때면 너를 떠올리며 다시 스스로를 채찍질해.

누군가는 아빠가 과격한 사람이라고 말할 거란다. 녹색의 테러리스트이자 파시스트라고 하겠지. 아빠의 사고방식이 극단적이며, 대중의 지지를 얻기 어려울 거라고 할 거고. 온갖 말을 할 거란다. 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아. 아빠는 좋은 사람이 되기보단, 좋은 세상을 원해. 누군간 그러더구나. 인간도 환경의 일부이며, 인간이 하는 행동도 환경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파괴를 향한 인간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조화를 지키기 위해 파괴를 파괴하는 행동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그렇게 부딪히고, 오르고 가라앉으며 움직이다 보면 세상은 더 좋은 방향에 이를 거야. 그 좋은 세상에 이를 수만 있다면 아빠의 이름이 녹색의 광인으로 남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 그 이름조차 결국 인간의 기억일 뿐이며, 세상에 남는 것은 오로지 조화란 걸 알기 때문이란다.

아빠는 외롭지 않단다. 아빠를 너무 걱정하진 마렴. 아빠는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동료를 찾을 거야. 아직 만나진 못했지만 정말 믿을 만한 분일 거라고 굳게 믿어. 무전기 너머엔 세상의 조화를 위해 애쓰고자 하는 분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 선생님께 정중히 말씀을 올리고, 아빠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같이 고민해보자고 말할 거란다. 선생님과 같이 자료를 모으고, 가슴 아프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해낼 거야.

널 잊지 않을 거야. 스스로 되새기며 무전기를 잡는단다. 이 무전기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알 수 없고, 환경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물건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큰일을 위해 당분간은 견뎌야겠지. 아빠는 이제 무전기를 들을 누군가에게 말할 거야.

❝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저는 엽록 포럼의 홍보 담당인 리우졔입니다. ❞

게시자 : WRITESAURUS Life, Dinosaur, Dur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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