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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땅 : 듀랑고 - 사업자

chaz.uu 2018. 4. 14. 10:23

네가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 세상이 널 끌어내리면 어떨까?

좋았던 때를 추억하면서 쓸쓸하게 패배자로 죽어갈래? 아니면 세상이 널 끌어내리는 데 실패했다는 걸 증명하려고 살아갈래?

노왁은 후자야. 영원히 후자야.

난 개척 회의의 하우아타고 노왁의 동료야. 내 얘기는 하지 않을 거야. 굳이 얘기하자면 노왁과 나는 공통점이 있어. 여성이고 30대고, 자녀가 있지. 노왁 얘기하는 걸로도 벅차니까 이 정도만 할게. 지금부터 내가 할 얘기는 노왁에게 직접 들은 건 아냐. 노왁은 과거를 말하는 데 관심없어. 노왁처럼 달려갈 수 없는 사람이나 과거를 추억하지. 나는 노왁을 알았던 사람을 여럿 만났고 그 사람들 말을 적고 정리했어. 노왁의 과거를 알게 되었어.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과장된 것도 있고, 내가 빼먹은 것도 있겠지만, 어느 정돈 노왁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평소엔 우르줄라라고 부르지만, 객관적으로 보이게 이 얘기에선 노왁이라고 부를게.

우르줄라 노왁.

좀 옛날 사람 이름 같기도 해. 노왁의 어머니는 급여 인상이라곤 전혀 없었던 특수학교 교사였어. 선량하고 인내심은 있지만, 자신의 환경을 바꿀 만한 의지는 없는 사람이었지. 노왁의 무능력한 아버지는 건설 쪽에서 일했어. 토요일 밤엔 노조 사람들과 카드 치며 돈을 잃어줬지만 해고당할 땐 조합의 도움을 받지는 못한 그런 사람이었어.

노왁에겐 성이 같은 다섯 명의 남매가 있었어. 6남매가 자라는 집은 벽돌로 된 공동주택이었대. 수시로 물이 샜고, 일가친척이 근처 골목에 다 모여서 살았지. 친척 중에 대학 문턱에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매일 덜 마른 빨래가 골목에서 썩었고, 냉장고에선 시큼한 냄새가 났어. 사촌 중에 둘은 서로를 경찰의 끄나풀이라 오해하고 총을 쐈고, 둘 다 그렇게 죽었지.

노왁은 그런 환경이 지긋지긋했어. 어중간한 가난함은 몇 대에 걸쳐서 대물림됐고, 노왁의 가치관으론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었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세상이 나아질 거란 어설픈 믿음과 밀주로 견뎠지만, 노왁은 헛소리를 믿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 노왁은 도수 높은 안경을 썼고 기른 머리를 뒤로 꽉 묶었어. 빼빼 마르고 늘 같은 셔츠와 청바지만 입고 다녔지. 노왁은 온수가 나오지 않는 공립학교와 공공도서관에서 문 닫을 때까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돌아갔어. 동창 중에 처음으로 총에 맞아 죽는 친구가 나와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어. 어떤 거든 가리지 않고 배웠어. 열네 살 생일날이었지. 노왁이 돌아오자 자정이었어. 거실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지. 어머니는 노왁이 장녀니까 잘 사는 동네에 가서 베이비시터 일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책은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했어. 노왁은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에 가장 아끼는 책을 먼저 넣고 생리대, 속옷과 양말을 담았어. 가족사진은 나오는 길에 가장 먼저 보이는 쓰레기통에 버렸지.

노왁은 갈 데가 있었어. 노왁은 그 집안에서 돌연변이였고, 덕분에 계속 장학금만 받고도 공부를 할 수 있었어. 유별나게 똑똑한 탓에 멀쩡한 세상에 사는 사람이나 정말 똑똑한 사람을 만날 기회도 생겼지. 가족이 뭐라건, 가족의 말이 법적인 능력을 갖지 못하게 무시해줄 수 있는 변호사도 만났어. 노왁은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았지. 변호사는 붉은 머리의 할머니였다는데, 본 사람들 얘기론 아마 유언장 맨 위에 노왁 이름을 썼을 거라고 하더라고. 변호사는 노왁에게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어떻게 돈을 버는지를 가르쳤어. 그 변호사 사무실 벽엔 행운의 상징으로 토끼발을 하나 늘 걸어뒀지.

남들은 열네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의 시간을 의미 없고 멍청하게 채워놓아. 노왁은 열아홉 생일에 자기 캐딜락을 타고 집에 나타났어. 운전기사는 먼지 하나 붙지 않은 정장을 입고 내려서, 뒷문을 열었어. 골목마다 사람들이 나와서 쳐다봤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가왔지. 노왁은 미소를 지었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더는 집안에서 발언권이 없었어. 노왁의 아버지는 노왁이 나온 기사를 오려서 탁자 유리 밑에 껴놨거든. 기사에서 노왁은 긴 머리의 빼빼 마른 여자애가 아니었어. 보란 듯이 헬스장에서 진행된 인터뷰 사진은 노왁의 단단한 팔뚝을 강조하고 있었어. 기사는 허름한 지방신문에 실린 거로 19세에 재산이 무일푼에서 백만장자가 된 대학생 사업가를 다뤘어. 기자가 그 재산은 거품이라며 곧 망할 거라며 질투하는 내용이었지. 노왁은 멋진 사업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돈이 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했지. 사실 19세에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면 어떤 사업을 했건, 어떤 경영을 했느냔 중요하지 않았어. 그걸 해냈단 게 중요한 거지. 세상엔 해내지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거든.

노왁의 사업은 점점 커졌고, 덜떨어진 노왁의 사촌들은 노왁 회사의 경비원이 됐어. 단순히 용돈 벌이 하는 대신 사업적인 이유로 총을 쏘기도 했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노왁의 성공을 보고 사고방식을 바꿨어. 그들은 노왁의 생물학적인 부모였지만, 노왁은 그들의 사상적인 부모가 되었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노왁이 번 돈으로 여행을 가서 관광도 다니고,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만나 노왁이 시킨 대로 경력 있는 사업가인 척도 했지. 친척들도 억양을 바꾸고 다른 사람인 척 행동했어. 그들은 노왁의 지시를 받고 돈이 흘러가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어. 노왁을 질투하는 사람도 늘어났어. 수표에 적을 수 있는 숫자의 길이가 늘어나는 만큼 세상엔 적도 늘어나는 거니까. 변호사를 만나면, 노왁은 자신을 질투할 사람 목록을 읽어줬어. 변호사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대.

노왁은 자본주의를 사랑했어. 얼마나 많은 낙오자가 나오건 노왁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어. 노왁은 낙오자가 아니었으니까. 낙오자의 동네에서 태어났지만 노왁은 벗어났어. 그건 노왁의 강력한 자산이자, 고치기 어려운 에고지. 사실 나도 자본주의를 사랑해. 자본주의가 아니었다면 노왁은 여전히 유럽 어딘가에서 곰이 근처에 있나 살피면서 산딸기나 채집하며 살았을 거고, 나도 태평양 남쪽에서 돼지 먹이나 찾다가 폭풍우에 휘말려 인생을 마쳤겠지. 자본주의는 우리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우리가 더는 과거처럼 허접한 방식으로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깨달음이야. 어떤 생각도 이만큼 우리의 삶을 바꿔놓진 못했어.

노왁은 그렇게 돈을 만들어냈어. 그러면서 많은 남자를 만났어. 다들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비슷한 남자들이었대. 취향이 한결같았나 봐. 여자도 몇 명 있었는데 그 남자들과 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다고 하더라고. 뭐 사생활이니까 이 얘기는 그리 더 하고 싶진 않긴 한데, 예외도 있긴 있었나 봐. 근데 그 얘긴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아서 신뢰는 안 가. 노왁이 미술 공부하는 히피 같은 대학생과 한때 같이 살았다는 얘기는 노왁이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맥락과 너무 안 맞거든. 어쨌든 노왁은 즐겁게 살다가 자신과 비슷한 남자를 만났지. 돈의 지고한 가치를 믿고, 타인에게 극도로 냉정하고 무관심할 수 있으면서도 정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은 인간적인 남자였대. 남자를 여자로만 바꾸면 이 문장은 노왁을 설명할 수도 있는 문장이었어.

남들이 서른이 되어서 남은 대출금을 걱정하며 불안한 커리어를 이어나갈 때, 노왁은 이미 10년의 경력을 마쳤지. 투자자 남편에 귀여운 아이들, 말 잘 듣는 가족과 친척들, 수시로 정중하게 거절해야 하는 인터뷰 의뢰, 자신을 숭배하는 직원들, 탈세를 위해 고용한 회계사들, 자신을 질투하는 사람들, 방이 13개 있는 집은 수영장에 악어가 들어오고, 주말이면 사슴 사냥을 나갔어. 정말 완벽한 삶이었지. 더 높은 곳만을 향해야 하는 삶이었어.

전용기가 워프에 휘말렸지.

노왁의 남편은 동체 착륙할 때 충격으로 튕겨 나갔대. 늘 명심해야 하는 거지만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다 헤어져. 서로를 마주 보며 서약하는 순간은 영원할 것 같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지. 노왁은 그 순간을 떠올렸을 거야. 자신과 서약했던 그 남자의 미소를. 현실로 돌아오면 같은 반지를 낀 남자가 조각나 있었지. 노왁의 아이들은 자기 아빠를 마지막으로라도 보고 싶어 했지만 노왁이 허락하지 않았어. 찢기고 부러진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지. 대신 노왁은 혼자서 남편을 모으고 묻었어. 간단한 묘비 하나 세우는 게 전부였지만 온몸이 땀범벅이 됐지. 아이들은 나무 밑에 앉아서 울었어. 돌아온 노왁이 아이들 손을 잡고, 트렁크를 끌고서 사고 현장을 벗어났어.

노왁은 상황 판단이 빨랐어. 근처엔 워프에 휘말린 다른 무리가 있었어. 노왁이 그 사람들이 갖고 있던 먹을거리와 옷가지를 보석과 돈뭉치로 바꾸겠다고 제안했어. 다들 좋다고 바꿨지. 다들 구조헬기가 날아오고 기자들이 곧 득실거릴 거라고 믿었나 봐. 그 사람들은 얼마 못 가 죽었어. 노왁은 그러지 않았어. 삶을 향한 태도가 운명을 바꾼 거지.

듀랑고는 노왁에게 진흙더미를 입에 집어 던졌어. 똥 한 무더기를 머리 위로 쏟아버렸지. 두 손엔 트렁크 가득 채운 옷가지와 에너지바, 초콜릿, 식수, 그리고 울부짖는 애들이 전부였어. 주식, 채권, 현금, 금괴, 지하실에 걸어둔 그림들, 저택, 중국의 이름 모르는 나라 시대의 도자기, 슈퍼카, 개, 아라비아 종 말 등 모든 게 저 너머의 세상으로 사라져버렸지. 그렇다고 노왁이 좌절했을까?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노왁은 그렇지 않아.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 병균과 진흙이 가득한 수렁으로 떨어져도, 누군가는 그 역경을 딛고 올라서서 나중에 사람들 데려와서 수렁을 메워버리고 그 위에 화려한 도시를 지어 버리지.

노왁은 해안에서 그 섬에 들른 사냥꾼들을 만났고, 말을 걸었어. 그들이 비싸게 여길만한 게 뭔지 알아냈어. 자식들이 울고 있는 걸 사냥꾼들이 지적해줘도 흔들리지 않았어. 그 순간 애들 우는 걸 달랜다고 아이들이 이후에 흘릴 눈물이 줄어들 건 아니니까. 노왁은 사냥꾼 무리의 일을 따라다니며 도왔어. 사냥꾼들은 불안정해역과 안정해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노왁에게 설명해줬어. 솔직히 말해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재능을 숨길 수 있는 건 길어야 몇 분이야. 몇 주 정도 지나자 사냥꾼들은 다시는 노왁에게 뭔가를 가르치지 않았어. 노왁이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지. 노왁 이전엔 아무도 사냥을 비즈니스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노왁은? 노왁은 스님에게 고기를 팔 수 있는 사람이야. 노왁은 그렇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몇 얻었고 일을 더 벌일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지. 사냥꾼들은 노왁이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 준비가 됐어. 노왁은 확실하게 보상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노왁은 측근들을 데리고 적절하게 다음 단계를 물색했지.

개척 회의는 어느 외딴 마을섬의 어수룩한 부족장 몇 사람이 만든 단체였어. 해당 부족들은 여러 섬을 오가며 장사를 했는데, 앞으로 장사하며 서로 인사나 하며 지내면 어떻겠냐며 연구 핑계를 대고 친목 단체를 만들었지. 노왁은 실무에서 해방되자마자 무전기를 여러 개 구해서 섬과 섬을 오가는 무전을 듣고 들었어. 애들은 사냥꾼 중에 베이비시터를 뽑아서 맡겼지. 노왁은 듀랑고에서 저평가된 것들을 찾았어. 그중 하나가 개척 회의였지. 개척 회의는 잠재성이 있었지만, 창설자들은 친목 말고는 관심이 없었어. 노왁은 개척 회의로 자리를 옮겼고 곧 그 허술하고 긴장 없던 조직을 장악했지. 당시 개척 회의는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얹은 사무실 한 칸이 전부였고, 상설로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노왁은 사냥꾼을 불러들였어. 그 친구들은 무력을 담당했지. 노왁은 그런 방식으로 일단 질서를 세웠어. 개척 회의의 대표격인 CEO는 자리를 지켰어. 노왁이 보기엔 그게 좋았거든. 노왁은 왕이 있는 나라 출신은 아니었지만, 허수아비 왕을 두는 게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회의 내에 있긴 했지만, 뭐 다양성은 어디서나 중요하니까 말이야. 그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있어. 하지만 노왁의 의사결정은 오로지 노왁의 것이야.

노왁은 듀랑고의 미래를 예상했어. 현대인은 탐욕적이고, 워프의 충격으로 잠시 거세된 것 같아도 그 욕망을 견뎌낼 순 없었어. 원시인이라면 해가 지면 동굴에 들어가 그런대로 만족하고 살았겠지만, 비행기를 타고 야경을 본 경험이 있는 존재들이 그런 삶에 감사할 수 있겠어? 개척자들은 어떻게든 듀랑고에서 가능한 한 빠르게 다시 그 문명을 재현하려고 했어. 욕망은 뗏목을 타고, 창을 들고, 먼 섬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꺾고, 동물의 몸에 화살을 꽂고, 무너지는 탄광에서 외마디 비명으로 사라지면서도 끝없이 피어오르고 뻗어 나갔어. 노왁은 그 흐름을 누구보다 잘 느꼈고, 그 흐름의 맨 앞에 있는 사람이었지. 나는 노왁을 보고 느꼈어. 이 듀랑고에 얼마나 오랫동안 야생이 발전 없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론 노왁 때문에 모든 게 달라질 거란 걸. 가끔 진지한 얘기를 할 때면 노왁은 나에게 그랬어.

❝이 세상이 무식한 시절로 돌아가는 건 절대로 못 참아. 세상은 더 효율적이고 진취적인 쪽으로 가야 해. 그러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노왁에게 효율적이고 진취적인 건 성장하는 경제였어.

사실 경제가 성립하려면, 몇 가지가 있어야 해. 교환할 수 있는 가치, 경제를 거부하는 자들을 누를 수 있는 무력, 죽을 때까지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있어야 했지. 섬마다 새로운 지식이 생겨나고 퍼져나갔지만, 불충분했어. 듀랑고는 준비가 안 됐어. 현대인은 자신들이 대단히 똑똑하다고 믿어. 똑똑한 건 지식 체계이지 현대인이 아니야. 그나마도 그 지식 체계는 현대적인 기반에 의존성이 높았어. 통신, 교통, 보건, 교육, 자원채굴, 행정부, 소비문화 이런 것들이 지구에선 기본값으로 존재했으니까 뭘 생각해도 이런 디폴트를 이용할 수가 있었지. 근데 듀랑고에서 뭐가 있을까?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고안해야 했지. 기본값은 듀랑고란 이름과 그에 걸맞은 끝없는 바다뿐이고, 거기 얹힌 작은 섬들은 서로 고립된 채 이해할 수 없는 워프로 이어졌지. 네가 아무리 창의적인 말을 할 줄 알아도, 조직 혁신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도, 오랫동안 일궈온 현대적인 기반이 없다면 넌 원시인인 거야. 수백 세대에 걸쳐 만든 기반을 다시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지. 지구보다 훨씬 고립된 지리적 조건에, 불친절한 기후와 환경변화를 바탕으로 말이야.

이 사실을 알면 다들 풀이 죽었어. 똑똑한 현대인이라 믿었던 자신이 그저 많은 숫자가 오랫동안 해낸 흐름에 실린 물거품 같은 존재란 걸 아는 게 유쾌한 사실은 아니지. 나도 노왁에게 이런 얘기를 처음 듣고는 한동안 기분이 나빴어. 바닷가에 서서 먼 곳을 봤지. 지구라면 그 바다 건너 어딘가에 철강을 만드는 공장이 있을 거야. 굴착 장비가 철광석을 캐고, 트럭이 운반하고, 배가 바다를 건너고, 하역하고, 철도에 옮기고, 공장에 자재가 들어오고, 적어도 공장에서 기계를 가동할 정도의 교육을 받은 인간들이 다른 공장에서 만들어진 차를 타고 공장에서 일했겠지. 저녁이면 일식집에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독일식 맥주를 마시고, 지역 풋볼팀 경기를 보고, 내일 있을 건강 검진 때문에 일찍 들어갈 수도 있고 말이야. 지구에선 이 모든 게 당연했는데 듀랑고에선 다 없어. 작은 섬들에 워프로 자원이 날아와봤자, 작은 섬이지. 듀랑고는 물과 흙으로 빚은 지리적 감옥이었던 거야.

평범한 인간들의 생각은 그래. 그래서 발전이 없지.

노왁은 가능성을 생각했어. 지리적 조건에 갇히지 않은 시장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말이야. 지금 개척 회의에선 신입들도 이 개념을 두고 몇 시간은 토론할 수 있을 정도지만, 노왁이 구체적인 개념과 방법론을 화이트보드에 정리하기 전까진 까놓고 말해서 아무도 몰랐어. 몇 세기는 생각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 화이트보드는 개척 회의의 가장 중요한 회의실에 있는데 아무도 손 못 대. 그 화이트보드를 보면 느낄 수가 있지. 노왁의 방법이 실패할 수도 있어. 하지만 노왁이 뭔가 하는 걸 막을 수는 없어.

노왁은 무전을 듣고 듀랑고에서 정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집중했어. 명상하며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기다리지 않았어. 듣고 괜찮다 싶으면 사소한 일부터 무조건 했어. 우린 큰 그림을 볼 재주가 없었으니까 불안했지. 정말 이런 세상에서 뭔가를 창출해내는 게 가능한 걸까? 하지만 일이 잘 된다 싶은 징표가 곧 나타났어. 사무실을 늘려야 했어. 건축가가 개척 회의가 있는 섬에 와서 계속 벽을 세우고, 바닥을 깔고 지붕을 올렸어. 개울이 흐르던 곳을 메우고 복도가 생겼지. 수평으로 늘리는 건 부족해서 수직으로 건물을 올렸어. 2층, 3층이 생겨났고 코너 오피스도 생겼지. 내 사무실엔 마호가니로 만든 가구가 필요했어. 노왁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내가 골랐지. 우리가 있는 섬은 그 섬에서 생산할 수 있는 자원 이상을 소비하고 있었지. 그건 그 섬이 다른 섬과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고, 듀랑고에서 더 거대한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 낼 방법이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단 뜻이었어. 노왁은 지구에서 정부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섬과 섬을 오가는 뗏목을 습격하는 해적을, 정부 흉내 내는 부족들이 소탕하도록 돈과 힘을 실어줬어. 아직 어떤 부족 정부도 한 섬을 넘어서는 실질적인 지배력과 행정력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개척 회의는 섬을 넘어서는 어떤 연결체를 만들어 내고 있었지. 그걸 다 누가 했게? 불안정섬을 오가며 자원을 캐고 필요한 곳에 보내는 개척자들이 해냈지, 라고 말하는 건 정치적인 말하기고, 결국 노왁이 해낸 거야. 노왁이 없었다면 그 개척자들을 연결하려고 누가 그랬겠어? 물론 다른 인간이 나타나서 해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인간은 나타나지 않았어.

사실 노왁에겐 모순적인 면도 많아. 내가 노왁이 하는 일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노왁의 일이 늘 진취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진 않더라고. 세상의 진보를 말하지만, 그 진보가 자신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타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 노왁이 무법섬에서 일어나는 일에 기여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노왁은 잔인한 면이 있어. 노왁이 데리고 온 사냥꾼들은 노왁의 명령만 따라. 사냥꾼은 해적을 찾으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물어보거나 하는 일이 없어. 재판 같은 것도 없지. 듀랑고에서 재판이 있는 부족이 몇 개나 있겠냐만, 미성년자가 포함된 해적들의 손을 묶고 그 끝에 돌덩이를 매달아서 바다에 던진다는 내용의 무전을 엿들으면 소름이 끼쳐. 내가 들을 수 없는 무전에서 그 사냥꾼들이 어떤 일을 할까 생각하면 무섭기도 하고 말이야. 뭐, 위악 떠는 것처럼 쉽게 말하는 내가 사실은 여려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노왁은 효율성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면, 서류에 줄을 긋고 새로 쓰듯이 인간을 대우할 수 있어. 난 노왁이 온정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망상하느라 잠을 설치기도 해.

그래도 난 노왁을 굉장히 좋아해. 왜냐고? 세상의 변화는 올곧고 바른 사람이 이끈다고 생각하지 않아. 노왁처럼 자기 모순적인 행동과 말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추진해가고, 그 과정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거야. 모순에 괴로워하는 인간은 햄릿처럼 끝나버리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남이 욕을 하건, 비난하건, 질투하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해낸 일의 부산물이 세상의 변화야. 루저는 그 결과를 보고 열등감에 젖어서 그 일은 누구나 해낼 수 있었고 누군가는 더 잘할 수도 있었다 같은 소리나 하겠지.

아침이면 노왁이 사무실로 와. 사무실의 공기가 팽팽해지지. 노왁은 개척 회의의 구성원들이 계속 일을 해야겠다는 압박을 줄 줄 알거든. 브리핑을 받으며 여러 사무실을 돌아다니고, CEO의 방 소파에 아이들 낮잠을 재우지. 그리고 쓸 만한 사람을 찾으려고 무전에 귀를 기울여. 정말 쓸 만한 인간을 찾는 게 자기 일 중 가장 중요하대. 그렇게 찾은 인간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시켜보기도 해. 노왁의 수준에서 그런 일은 할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신은 더 큰 단위의 결정만 하면 돼. 하지만 노왁은 자신의 감각이 무뎌지는 걸 원하지 않나 봐.

❝나한테도 토끼발이 필요하거든.❞

자. 이제 노왁이 의자에 기대서 무전기를 보고 있어. 무전 너머의 누군가를 평가하고 있나 봐. 쓸만한 사람일까 고민하고 있겠지. 나도 며칠 전부터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어. 불안정섬을 오가며 그 정신 나간 포럼의 일이나, 캠프에 시간 낭비하는 여자애 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더라고. 난 영 미덥지 않지만, 사람 보는 눈은 노왁이 훨씬 좋으니까 잠자코 지켜봐야지. 이제 노왁이 무전기의 버튼을 눌러. 그 말을 하려고 해. 몇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야.

❝평생 돌날이나 만들 거예요? 아니면 나랑 같이 세상을 바꿔 볼래요?❞

게시자 : WRITESAURUS Life, Dinosaur, Dur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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