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나올 글은 믿지 않아도 그만이고 믿어도 그만이다. 적절한 거짓과 사실이 섞여 있다. 이야기를 끌어낼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누가 듀랑고를 지배하는가?

공룡? 강하다. 창칼을 든 개척자를 이빨로 물어뜯고 큰 발로 짓밟고 꼬리로 후려치어 곤죽을 만들고 먹어 치운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공룡이 바위에 인간 박멸이란 목표를 적어두고, 주말마다 모여서 궐기 대회를 열고, 인간과 싸우려고 신무기를 개발하는가? 공룡이 자식에게 복잡하고 특정적인 사명(使命)을 전달할 방법이 있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론 없어 보인다. 아니라는 증거가 있다면 언제든 제보를 환영한다. 공룡의 신체는 뛰어나지만, 정보를 다루는 방식은 형편없다. 공룡의 뇌도 세상을 인지하고 정보를 처리하지만, 그 뇌들은 고립되어 있고 서로가 가진 정보를 연결할 수단이 희박하다. 개별적인 공룡은 개별적인 인간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지만, 승리 후에 모여서 더 큰 승리를 끌어낼 회의를 하지는 못 한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앞발로 회의록을 작성하는 게 어렵기도 할 테고 말이다. 물론 회의록을 쓸 수 없다고 생물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건 아니다. 존엄성이 생존을 보장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은 정보를 떠올리고, 전달하며, 여러 형태로 저장할 수도 있다. 잡담부터 벽화, 문자, 공문서, 단파방송, 아르파네트(ARPANET)까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여러 체계를 고안해냈다. 일부 정보는 장기간 생존하며 인간을 지배한다. 법이나 이념, 종교도 하나의 정보라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실상은 그렇다. 정보 처리 능력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여러 세대에 걸쳐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덩치보다 싸움을 잘 하진 못 했던 이 동물은 지구에서 지배자가 되었다. 듀랑고에서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국 지배자가 될 것이다. 누가 듀랑고를 지배하는가? 그렇다. 인간이다. 인간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고, 그를 바탕으로 듀랑고를 지배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서술에 가슴이 뭉클해질 것이다. 돌멩이를 처음 쪼개 돌날을 만들던 원시인의 모습부터 우주왕복선이 연료를 분리하는 장면까지 전경(全景)이 스쳐 간다. 뿌듯함과 기쁨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인간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정보는 가장 성공한 대민(對民) 심리전이다.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일부 인간이 나머지 인간을 지배할 뿐이다. 사람 대부분은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며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를 자유만을 갖는다. 그렇지만 지배자는 피지배자에게 주인이란 의식을 심어주려고 애쓴다. 당선자가 꽃다발과 축하 박수를 받는다.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지지자도 보인다. 당선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지지자들이 환호한다. 당선자가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사실 진짜 이긴 사람은 한 명이다. 그 한 명은 그 정보를 숨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일부와 다수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정보 처리 능력이다. 인간 아닌 동물과 인간을 갈랐던 기준이 인간도 가른다.

정보는 지배의 핵심이다. 피지배자도 양적으로는 풍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정보를 판단하고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지 못한다. 공룡이 그렇듯이 말이다. 정보기관은 개인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 정보에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권력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원천이 정보에서 비롯한다. X는 그래서 정보기관을 사랑했다. 지배에 필요한 것이 거기에서 태어나니까. 그렇다면 X는 누구일까? 인명사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X는 언덕 위의 집에서 태어났다. 저택은 양지바른 자리에 섰고 우거진 숲을 내려다봤다. 포장하지 않은 오솔길에 큰사슴이 울었다. 호수엔 물오리가 날아올랐다. 어머니는 X에게 유화(油畵)와 승마, 운전, 라틴어, 엽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두 사람은 여행을 자주 다녔고, 산기슭을 걷다가 굶주린 곰을 만나기도 했다. 짐승은 커다란 앞발을 들며 울부짖었다. 두 사람은 매그넘을 장전했다. 두 사람은 잡은 동물로 박제를 만들 만큼 손재주가 좋았다. 아버지는 공식적으로는 외교관으로 근무했지만, 실제론 전혀 다른 일을 했다. 일은 충실했지만, 집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도 1년에 백 단어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느 나라의 모 지역에서 무기상에게 총알을 23발이나 맞고 숨졌을 때, 신문엔 부고조차 나지 않았다.

X는 무너져 가는 벽돌담을 전통이라 부르는 오래된 대학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했다. X는 그곳에서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를 알아듣고 말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발간하는 유명 저널의 편집장이 되었고, 여성을 받지 않던 사교 클럽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다. 끝까지 입회를 반대했던 선배 회원은 몇 년 뒤에 해외여행 중 술 취한 현지인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동문의 증언에 따르면, X는 늘 권력과 지배구조에 관심이 많았고 타인과 싸워서 승리하고 지배하는 것을 즐겼다. 친구는 없었고 추종자만이 존재했다.

졸업 후에 X는 사라졌다. 알려진 바로는 적도 지역에서 곡식을 취급하는 무역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실제론 많은 정보기관이 그렇듯 위장이었다. X는 정보기관에 들어갔다. 커리어는 아버지의 죽음을 향한 복수심이나 정보관이 흔히 강요받는 애국심과는 무관했다. 그저 정보에 끌렸다. 처음 출근했을 때는 화장실을 가려면 웬만한 와이드 리시버의 한 시즌보다도 먼 야드를 전진해야 했다. 곧 X는 승진했고, 전용 화장실이 딸린 사무실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연루됐던 사건 파일엔 눈길 한 번 주는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가 어머니의 애인과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땐 유일하게 휴직을 했다. 모스크바, 뉴욕, 라고스, 베를린, 베이루트, 뭄바이. 여러 도시의 호텔에 X는 나타나 매번 다른 이름으로 체크인하고 체크아웃했다. 그때마다 언어와 억양, 대화 주제, 목소리와 화장, 머리 스타일이 달랐기에 호텔 지배인의 모임에서 X의 존재를 아는 일 같은 건 없었다.

X는 냉전의 끝물에 끼어들었다. 냉전은 좋은 시대였다. 언어가 발명된 이래로 사람들끼리 서로를 싫어할 이유가 수만 가지는 넘쳐났지만, 냉전 때는 하나면 충분했다. 인류가 그때만큼 통합된 적도 없었다. 냉전이 아니었으면 서로를 증오했을 사람들이 더 큰 적을 보고 연대했다. 우주의 허공, 바다 깊숙한 곳, 사막과 극 지대, 정글과 초원 어디에서든 적과 자신을 분명히 나눌 수 있었다. 정보는 국빈 대접을 받았다. 예포(禮砲) 소리는 아름다웠다.

X는 경력 초반부터 정보의 속성을 깨달았다. 선출되는 정치인은 자신이 여론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여론은 주관적이고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 뭉치였다. 술집에서 여러 사람이 앉아서 보드카를 돌리면서 하는 대화도 여론보다는 객관적이고 맥락에 개연성이 있었다. 여론은 정보 몇 개에 요동쳤다. 어느 지역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하던 사람 몇이 제복 입은 자들의 총에 맞았다거나, 어느 지역에서 플루토늄을 실은 화물차량 몇 대가 몇 마일 정도 이동했다거나 하는 정보 몇 줄은 여론을 완전히 다른 주제로 뒤집어 놓았다. 정치인은 이런 정보들에 반응하느라 임기 대부분을 첫 사교 파티에 나온 사람처럼 보냈다. 그들은 스스로 가치 있는 정보를 생산해내지 못했다. 남의 정보에 휘둘렸다.

X는 표를 받지 않고도 지배자의 자리에 접근해갔다. 지배자라고 오인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들이 진짜 지배자였다. 냉전 시절의 선출직은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라 믿고 싶은 정보에 얼마든지 공적 비용을 낼 용의가 있었다. X는 여러 나라에서 반역죄로 대우받을 수 있는 정보를 취급했다. 기소된 적은 없었다. 대신 그 나라들로부터 비공개로 훈장을 받았다. 선출직은 정보 제공자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선출직은 바뀌어도 정보 제공자는 바뀌지 않았다. 국익을 위한단 말이면 모든 설명을 갈음할 수 있었다. 좋았던 날들이여.

냉전은 끝났다. 테르툴리아르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개선장군이 행진을 하면 노예가 뒤에서 말했다. 그대도 인간임을 기억하시오. 노예가 유창한 라틴어로 했을 그 격언은 뒤에 메멘토 모리란 개념으로 이어졌다. 그 말을 풀자면, 모든 것엔 끝이 있다. 증오는 여전히 번성했지만, 아무리 잘난 증오도 사그라지고 다음 증오에 자리를 뺏긴다. 질서는 재편되었고, 정보의 패러다임은 달라졌다. 신냉전이든, 다극 체제든 새로운 시대의 핵심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단 점이었다. 고전적인 정보기관은 더는 맞지 않았다. 선출직조차 의기양양해서 좀 더 젊고 새로운 세대가 정보를 처리하기를 요구했다. 거대하고 음침한 정보기관 내부의 변화는 더뎠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었다. X의 동료들은 하나둘 조직을 떠나 연금 생활자가 되었다. X는 따분하게 살 생각은 없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자신을 바꿀 생각은 없었으니, 자신에 맞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찾아야 했다.

듀랑고.

X는 찾아냈다. 듀랑고를 다룬 자료는 엉성했고 기만적이었다. 헛소리로 주의를 돌리는 방법은 흔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마술사와 첩보원도 써먹었다. X는 자료가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거로 생각했다. 자료가 헛소리하면서 숨기고자 하는 “대상”을 찾아내면, 그 대상은 값어치가 있을 거고 정보기관을 압박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X는 해당 대상이 선출직의 정치적 자금을 숨겨두는 유통 경로라고 생각했다. 선출직을 괴롭히면 무너지는 자신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는 데도 좋으리라.

그러나 X는 자료를 정독한 끝에, 부정하기 어려운 몇 가지 사실을 발굴했다. 자료는 미숙하고 불완전했지만, 다른 대상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자료 자신이 묘사하는 사실 자체를 다뤘다. 의심과 번복 끝에 X는 여러 루트로 정보를 얻어 교차 검증했다. 곳곳을 검게 칠한 몇 톤의 보고서는 어떤 “계획”의 변천을 다루고 있었다. 듀랑고에서 계획이 이뤄지고 있었다. 첫 번째 계획은 실패로 끝난 게 확실했다. 첫 번째 계획의 기초가 된 “스쿱 보고서”는 낙관주의로 빛이 바랬다. 두 번째 계획은 아이디어 차원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었다.

“5층”은 다양한 조직에서 인원을 흡수했다. 5층은 계획을 총괄하는 집단이었다. 연락처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5층은 조직 문화의 신중함에도 아마추어리즘이 들끓었고 약점은 많았다. 5층이 처음 정보공동체에서 인원을 뽑을 때 비협조적인 곳이 많았고 덕분에 얼치기들이 모여 들었다. X는 흐루쇼프처럼 5층의 무언가를 쥐어짰고, 5층은 비명을 질렀다. X는 선출직조차 알지 못 했던 5층의 약점을 간파하고 괴롭혔다. 5층의 내부자는 방어책을 급조했다. X는 5층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계획을 주도적으로 기안했다. 내부자는 훼방을 일삼다가 X가 만든 두번째 계획이 사실상 공식이 되자 관광객처럼 얹혀 가길 원했다.

계획은 듀랑고에서 새로운 지배구조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지배구조만 확실하다면,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대처할 수 있단 판단이었다. 그곳에선 여러 집단이 흙 속에 묻힌 씨앗처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채 때를 기다렸다. 적절한 양분과 햇빛만 있다면 잘 자랄 것이었다. 정보공동체는 균류에 가까웠다. 그늘 속에서도 자랄 자신이 있었다. 집단의 씨앗이 뻗어나 큰 몸집을 이루면 균류는 그에 붙어 공존할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은 양분을 뺏고 말려 죽인다.

X는 조직을 편성했다. 조직의 이름은 가칭으로 “위원회”라고 했다. 위원회는 정보와 역정보를 수집, 생산, 유통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기로 했다. 정보를 실현하는 쪽에 예산을 크게 잡았다. 더 지배적이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위원회의 핵심 자리는 유능하고 믿을 만한 측근을 앉혔다. 보고 체계의 요충지에, X의 전략을 조직문화에 반영할 수 있는 전문가를 편성했다. 비어 있는 자리엔 추천과 지원을 받아 몇 배수의 인원을 포섭했다. 길고 긴 연막과 기만 뒤에, 회의와 교육이 이어졌다. 나이가 들수록 더 긴 시간 단위의 생각을 하기가 편했다. X는 벙커에서 가능한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주기적으로 인원을 탈락시켜 긴장을 키웠다. 세상 어디에서 어떤 분쟁이 일어나고, 어떤 도전이 있건 듀랑고만큼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새로운 계획엔 명목상 몇 가지 조건이 붙었지만, X에게 재량권이 있었다. 조건을 요구한 선출직은 다른 스캔들에 쫓겨 조건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조건을 다시 떠올릴 때면 임기는 끝난다. 예전부터 반복된 일이었다. 5층의 내부자들은 위원회를 견제하고자 끼워 넣기로 “둥지”를 감찰기관으로 만들었다. X의 판단은 달랐다. 계획의 목표만 잘 실천하면 둥지는 무시하고 갈 수 있었다. 둥지는 무능했지만, 그저 그 자리에 원래 있었단 이유로 기회를 얻었다.

어느 시점에 계획은 시작됐다. 계획은 자신의 시간대와 위치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 없었다. 이동 중에 시간대는 몇 번이나 조정되었다. 순직자가 여럿 나왔다. 바위에 별을 새기고 순직자의 서류를 소각했다. 위원들은 봉인을 뜯어 새 암호를 열었고 기존의 암호를 불태웠다. 비문이 담긴 캐비닛이 정글을 오갔다. 위원회란 가칭은 그대로 고정되었다. 섬으로 흩어진 위원들이 현지의 상황을 파악했다. 한동안은 정보 체계를 구축하는 데 비용을 들였다. 정보가 모이자 소위원장들이 각자의 목표를 점검하고 수정했다. 그 뒤엔 현지인으로 구성된 “도급업자” 체계를 촘촘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위원회는 어느 섬에 어떤 공룡이 돌아다니건 신경 쓰지 않았다. 방해되면 장차 머리뼈 화석에서 유탄발사기에 맞은 자국이 나오게 하면 됐다.

듀랑고는 정보기관에 이상적이었다. 적은 예산으로도 효율적인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다. 선출직이 대리석 건물에서 마이크 붙잡고 떠드는 일도 없었다. 적대적인 세력이 있다면 서류에 적으면 됐다. 서류에 적힌 서명으로 섬은 불타고 생존자는 없었다. 누군가의 앙심이나 양심을 보도할 언론도 없었다. 포섭한 도급업자들은 탐욕에 찌들었고,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면 어떤 요구도 받아들였다.

무법섬과 불안정섬, 안정해역의 섬에서 이뤄지는 일이 X가 작성했던 메모의 영향을 받았다. 누군가 무법섬의 소모적인 전쟁, 인간의 이타심을 엿볼 수 있는 캠프, 개척자 협약 등 정부 없이도 성립하는 자발적인 질서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 말한다면, 말한 사람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X도 말한 사람을 미치광이라 거들 것이었다. 위원회의 역정보는 제 역할을 했다.

분열 정책도 유효하게 작동했다. 협력은 비슷한 언어와 사고방식, 문화적 배경 등을 오랫동안 공유해야 가능했지만, 증오는 단 몇 건의 사건만으로도 증폭시키는 게 가능했다. 갓 워프로 떨어진 조난자부터 무법섬의 거대 부족장까지 세상에 분노했고 서로를 증오했다. 도급업자가 이를 가능케 했다. 이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이 그 일을 원해서 한다고 믿었다. 도급은 X의 메모로부터 여러 단계를 거쳐서 윤색되었고, 동기를 부여받았고, 독립적으로 운영된다고 믿을 만큼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도급업자의 상상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빚어진 일은 아니었다. 진시황이 전투기를 몰고 중국을 통일하지 않은 건, 진시황이 그런 정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지 진시황이 중력 가속도와 공중 기동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급업자는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보를 얻을 수 없을 뿐이었다.

X의 계획은 지배구조를 만들고 독점한다는 목표를 달성해 가고 있었다. 잠재적인 위험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둥지는 의욕이 없었고, 첫 번째 계획의 잔류 인원은 무기력했다. 실로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X는 두 가지 정보를 깨닫게 되었다. X는 중요한 깨달음을 스스로 “계시”라고 정리한 메모로 보관했는데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첫 번째 계시는 의심이었다. 어떤 가능성을 향한 의심이었다. 지위와 책임 범위를 고려할 때 주변에 공개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검토해야 하는 어떤 가능성의 문제였다. 의심은 시간을 잡아먹고, 의욕을 떨어뜨리는 일이 잦지만, 기본적으로 자주 볼 수 있고, 합리적이고, 이해할 만한 범위 안에 있는 것이었다. 계획이 추구해야 할 여러 조건에서 달성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게 있었고, 이를 의심하며 다른 대안을 찾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었다. 설령 그게 계획의 전면적인 유보를 전제하더라도 최고 사령관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고민이었다. X는 첫 번째 계시를 세 단어로 정리했다.

“D2E 전면 재검토.”

두 번째 계시는 달랐다. 그 계시는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도, 들어본 적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 건 유약한 자에게만 존재하는 거로 생각했다. 정상적인 조직이라면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그런 목소리를 가진 인간을 쳐낸다. 가장 높은 자리엔 인간의 마음이 불필요했다. 메마르고 건조한 사고만이 작동해야 했다. 그 목소리는 물기를 가득 품었고, 온도가 달랐다. 그 목소리는 불타는 섬과 그을린 주검, 화약 냄새와 머리에 총부리를 갖다 대는 부하 사이로 걸으며 말했다. 두 번째 계시는 한 단어로 정리됐다.

“양심.”

X는 한밤에 눈을 떴다. 머리맡에 둔 위스키를 마시고 가운 끈을 조였다. 비록 낯선 계시에 놀랐어도 생각하는 도구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계시가 앞으로 영향력을 확장할 가능성을 검토했다. 대응이 필요했다.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측근이나 부하, 포섭한 도급업자와는 거리가 있는 새로운 인물을 원했다. 책상으로 가서 불을 켜고 별도로 스크랩한 보고서를 꺼냈다. 717소위원회에서 올린 것으로 다른 소위원회엔 공개되지 않는 보고서였다.

보고서는 K란 인물을 다뤘다. 보고서 표지에 K의 사진을 클립으로 끼워 놓았다. X는 K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사진은 화이트보드에 붙였다. 마커로 주석을 덧붙였다.

“정의로우나 독선적.”

X가 안경을 썼다. 이젤을 꺼냈다. 밖에서 경호원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X는 물러가라고 짧게 답했다. 사진을 보고 스케치를 했다. 목탄이 움직였다. 카펫에 가루가 떨어졌다. 스케치의 윤곽이 드러나자 X는 엽궐련에 불을 붙였다. 잔에 위스키를 새로 따랐다. 스케치를 계속 고치고 다시 그렸다. 스케치의 인물은 K와 닮았지만, 어딘가 X를 닮은 것처럼도 보였다.

X는 책상으로 돌아와 보고서를 더 읽었다. 불명확한 부분이 많고 의심스러운 대목도 많았다. 그러나 흥미를 끄는 부분도 있었다. K는 독특했다. 썩은 구조물에 끼인 깨끗한 쐐기와 같았다. 쐐기는 구조물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할 수도 있고, 뽑혀서 구조물이 무너지게 할 수도 있었다. 보고서 중간엔 여러 다른 이름도 적혔다. X는 소리 내어 읽었다.

“샤를리즈 밴던버그: K에게 매우 협조적인 인물. K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최측근으로 추정. 가까운 이들에게 찰리로 불림. 낙관주의자로 자신을 알리고 있으며, 여러 해역을 오가며 상업에 종사. 재산 규모는 웬만한 대형 부족의 부족장들을 압도하는 것으로 추정. 적극적인 접근 및 포섭 가능성 검토 필요함.”

샤를리즈의 사진은 흐릿했다. X는 화이트보드에 그 사진을 붙였다. 보고서의 샤를리즈 밴던버그 밑에는 앙코라란 이름이 있었다.

“앙코라: 무전에서 관측된 인물. 사진 없음. K가 앙코라 섬의 기차 스쿱 현장에서 구조한 것으로 추정. 수수하고 특징 없음.”

X는 수수하고 특징이 없단 대목을 몇 번 반복해서 읽었다. 화이트보드에 앙코라라 적었다. 앙코라라 적은 것에 동그라미를 치고 219라고 적었다가 손으로 지우고 133이라고 고쳐 썼다. 누군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X가 답이 없자 문틈 아래로 서류가 든 봉투를 밀어 넣었다.

“안 잔다.”

X가 말했다. 문 건너의 인물이 수줍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방해드리는 걸 까봐 그랬습니다. 전에 회의에서 말씀하셨던, 도급업자 중에 연락 끊었던 아이들 동향을 정리한 건데요. 여전히 징병대장이라고 자기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 아침에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지금 말씀드릴까요?”

“일단 읽어 보고. 보고서를 잘 못 썼으면 내일 아침에 보자꾸나. 얘야.”

X는 봉투를 묶은 줄을 풀었다. 오래전에 관리하다가 연결 고리를 끊은 모 도급업자 그룹의 동향을 정리한 보고였다. 여전히 그때 배운 방식에서 별 발전 없이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사람을 운반하는 경로를 구축하는 방법조차 바뀐 게 없었다. 페나코두스와 그들을 같은 별에 가둔다면 페나코두스가 먼저 인권이란 개념을 발견할 것이었다. 차라리 페나코두스로 태어나면 고기라도 먹을 수 있었겠지.

화이트보드에 붙은 사진과 적힌 이름, 보고서는 다 각자의 형태로 존재했다. X는 그것들을 연결할 방법을 생각했다. 정보는 연결될수록 더 가치 있고 독특한 상호작용을 만들어냈다. K, 찰리, 앙코라, 징병대장. 두 번째 계시에 따라붙는 징조인지도 몰랐다. 징조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좀 더 묵혀두고 봐야 했다.

X는 안경을 벗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다. 일어나면 침대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복귀한 소위원장과 비서에게 보고를 받을 것이었다. 아흐마디가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오후엔 사냥을 나갈지도 몰랐다. 트리케라톱스 사냥을 할 땐 포성이 워낙에 커서 누군가 엿들을 염려 없이 측근과 중요한 대화를 하기 편했다. 연막으로 쓰는 이상한 통신에 직접 끼어들어 헛소리를 꾸며내며 소일거리를 할 수도 있다. 모든 게 순조로울 것이다. 두 번째 계시만 빼면 말이다. 어쩌면 그 계시 때문에 일어나서 감청실로 가서, 원하는 채널을 찾아낸 뒤에 마음속의 목소리에 대응하려고 무전을 걸지도 몰랐다. 도발적으로 첫 문장을 꺼내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X는 한 문장을 떠올렸다. 그 문장을 말하면 다른 문장은 관습적으로 술술 나올 것이었다.

“얘야. 그 꼴로 평생 살고 싶니?”

게시자 : WRITESAURUS Life, Dinosaur, Dur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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